수림재경기 / 가평군
2024. 1. 12. by. 길보경
글ㆍ사진 ㅣ 길보경
눈(雪)이라는 마법 같은 존재는 한겨울에도 포근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잔뜩 움츠러든 몸을 보드랍게 풀어내기까지 한다. 이 계절의 가장 호화로운 경험이란, 설경을 완상하는 것이 아닐까. 온 세상이 눈으로 새하얗게 덮인 날, 우리는 가평군 설악면 자리한 수림재로 여행을 떠났다.
구불구불한 산자락을 얼마간 달렸을까, 계곡의 물소리가 흐르는 낮고 조용한 마을에 수림재가 있었다. 수림재(水林齋)는 그 이름처럼 물과 나무를 품은 집이다. 호스트가 일본 북해도에서 지내며 길어 올린 영감으로 빚은 집이기도 하다.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의 풍광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단정한 콘크리트의 외벽은 언뜻 미술관에 온듯한 인상을 주었다. 간살문 사이로 나타난 수정원을 따라 징검다리를 건너자 객실로 가는 자작나무 길이 연이어 펼쳐졌다. 눈이 차분히 내려앉은 길을 따라 환상적인 설경을 감상하며 숙소동으로 향했다
마당에는 예상치 못한 공간이 등장했다. 캠핑과 풀빌라가 결합된 형태로, 바비큐와 불멍을 즐길 수 있는 화로대를 갖추었다. 객실을 통해 프라이빗한 수영장과도 연결되어 있어 아웃도어 라이프를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복층 구조로 디자인된 숙소 내부는 층마다 침실과 욕실을 갖췄다. 1층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단연 주방. 비정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아일랜드가 놓여 있었다. 다이닝 테이블 및 라운지와 바로 연결된 대면형 주방 구조라서 동선이 매우 쾌적하고 편리했다.
눈이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기 최적의 장소, 침실. 눈이 사뿐히 내려앉는 소리를 가만히 눈과 귀로 감상하고 있으니 충만감이 내면에서 차오르는듯했다. 번잡한 도시 환경과 멀어져 자연 속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니 절로 마음에 여유가 깃들었다.
이곳이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닌 집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시선이 닿는 곳마다 수려한 풍경이 펼쳐졌다. 각기 다른 형태의 창 너머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을 조우할 수 있었다.
욕실의 실내 조경은 감격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다. 럭셔리의 끝은 진정 자연이라고 했던가. 가장 사적인 영역마저도 정원과의 연결감을 극대화해 채광을 듬뿍 누리면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차경할 수 있었다.
시간에 맞춰 행동하는 도시 생활과 달리, 이곳에서는 자연적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해가 조금씩 기울자 슬슬 저녁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의 메뉴는 평소 도전해보고 싶었던 우니 파스타와 바비큐, 딸기 시금치 샐러드.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는 영화를 보며 간식 타임을 즐겼다. 홀리데이 분위기가 흐르는 때에 딱 맞는 영화를 보면서, 남은 와인을 마셨다. 바깥의 어둠이 더욱 깊어지니 잠깐 밤산책을 다녀오고 싶었다. 곧장 뱅쇼를 끓여 정원을 거닐며 마셨다. 밤이 무르익었을 때도 여전히 아름다운 숙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잠을 잤더니 개운하게 눈이 떠졌다. 전날처럼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침대가 낮아 마치 눈과 함께 자고 일어난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웬 호사인가- 하며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간단히 아침을 차려 먹고, 챙겨 온 시집을 읽었다. 마침 책과 현재의 상황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짜릿함이란. 독서의 기쁨을 만끽하며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다.
새해를 시작하는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떠난 이번 여행. 수림재는 그 목적의 완벽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좋은 건축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그것은 자연환경에 대한 존중이 느껴지는 건축이다. 자연의 미세하고 느린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축은 곧 행복감을 주는 공간의 기틀이기도 하다. 집의 안팎에서 자연을 듬뿍 누리도록 설계한 수림재는 어느 계절이든 자연을 닮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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