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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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곳이 말해주는 것

한옥에세이 서촌서울 / 종로구

2025. 4. 29. by. 길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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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

글ㆍ사진 ㅣ 길보경

당신이 머무는 곳이 곧 당신이다. 매일 향하는 장소가 결국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프리랜서가 되며 활동 반경이 급격히 좁아지자, 주로 발걸음을 옮기는 곳이 더욱 내 정체성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서촌은 특별한 이유 없이도 자주 가게 되는 동네다. 주거지와 일터에 관계없이 오랫동안 꾸준히 찾는 곳이라는 점에서 조금 각별하달까. 봄기운이 완연한 4월의 어느 날, 자칭 ‘서촌 예찬론자’로서 봄맞이 여행을 다녀왔다.

집에서 버스를 타면 30분 내로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서촌은 매번 새롭고 기분 좋은 감정을 안겨준다. 인왕산의 자연과 고즈넉한 궁궐, 한옥 마을처럼 다분히 한국적인 요소와 동네 곳곳의 개성 넘치는 풍경 덕분이다.

‘잘 아는 동네’로 떠나는 여행의 묘미는 지도를 펼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에 있다. 나와 연인은 경복궁 앞 돌담길을 따라 가볍게 산책을 한 뒤, 오늘의 숙소인 '한옥에세이 서촌'으로 향했다. (*추천 장소는 글 하단에서 소개)

숙소가 자리한 골목에 들어서자, 거리의 소음이 잦아들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불과 한 블록 전까지만 해도 카페와 갤러리, 소품 가게들로 북적이던 길인데, 이 골목에서는 마치 다른 시간대에 들어선 듯 인적마저 드물었다. ‘한옥에세이 서촌’의 대문을 열자 ‘ㄱ’자 구조의 마당을 품은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지는 무렵, 마당에는 햇살이 길게 내려앉아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호스트는 이곳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뜻하는 ‘에세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착안해 이름 지었다. 한옥이라는 전통의 형식을 오늘날의 감각에 맞게 풀어내 현대인에게 최적화된 숙소를 목표로 설계했다. 특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멍 때림’을 유도하는 쉼의 공간을 구현한 것.

그 의도는 공간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주 출입구와 라운지가 있는 왼편에는 사계절 내내 불멍을 즐길 수 있도록 난로를 두었다. 또 마당 방향으로는 안락의자를 배치해 자연을 감상하는 존을 만들었다.

목재로 간결하게 꾸민 주방에는 싱크대와 식기류, 드립 커피세트가 알차게 준비되어 있었고, 높은 층고 덕분에 공간은 훨씬 더 넓고 여유롭게 느껴졌다.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 음악과 산뜻한 향기까지 어우러져 작은 호텔 라운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루를 따라 오른편으로 향하면 욕실과 자쿠지, 침실이 차례로 이어진다. 넉넉한 수납공간이 있는 캐비닛, 부드러운 룸 웨어, 다구와 입욕제까지 세심하게 준비돼 있었다. 인상적인 부분은 대청마루와 연결된 통창 옆 욕조였다. 창을 열고 마당을 바라보며 즐기는 입욕은 마치 야외 스파에 온 듯한 호사를 안겨줬다.

침실에는 두 사람이 누워도 충분한 크기의 넓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옆 작은 창으로는 소담한 담장이 보였고, 천장을 올려다보면 옛 서까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침실 통창에 설치된 커튼을 내려 보았다. 명주와 삼베를 섞은 추포 원단 소재로 제작한 커튼에서 은은하고 담백한 미감이 느껴졌다.

'한옥에세이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은 어디에 머물든 마당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담장 위 수막새 하나에도 시선이 머문다. 조경과 담장의 조화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통창을 활짝 열어두니 이웃집의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이 동네의 주민이 된 듯한 기분으로 여유로운 한낮을 보냈다. 문득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는 감각이 생경하게 여겨졌다. 도시인의 삶에서는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끊임없이 쳇바퀴 속에 갇히기 때문이다.

오늘만큼은 의도적으로 그 리듬에서 벗어나 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하루.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맛있는 음식과 술이 아닐까. 우리는 연어 샐러드를 만들고, 툇마루에 앉아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 순간 비로소 여행자라는 기분이 선명해졌고, 천천히 눈앞의 것들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현재에 집중하는 시간은 참으로 귀하고도 풍요롭다. 해가 저물 무렵, 라운지로 자리를 옮겨 저녁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껴두었던 최애 예능 <하트 페어링>을 틀고, 회와 와인으로 꾸민 소박한 만찬을 즐겼다. 사소하지만 확실한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산뜻한 밤바람이 그리워질 즈음, 다시 마당으로 나가 야식 타임을 누렸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고수와 양파, 고추를 잔뜩 넣은 육개장. 냉장고 속 남은 야채를 아낌없이 투하해 특별하고도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다. 여기에 라임즙까지 뿌린다면 똠얌꿍의 맛과 흡사해 한층 더 이국적인 맛을 낸다.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목욕만 한 것이 없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맥주를 홀짝이며 책을 읽었다. 곧이어 숙소에 마련된 입욕제를 넣으니 스파 준비 완료! 침실과 라운지 사이에 욕조가 위치한 구조 덕분에 입욕 중에도 원하는 활동을 함께 즐기기 좋았다. 설명 없이도 자연스럽게 사용 가능한 오디오, 다구, 커피 드리퍼, 서적 등은 숙소에서의 시간을 더욱 편안하고 충만하게 만들어준다.

이곳이 서울 한복판, 그것도 서촌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또 다른 장치는 사계절 사용 가능한 난로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액체 연료로 누구나 손쉽게 불을 지필 수 있어, 깊은 밤 불멍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차를 좋아하는 내게 다도는 이미 일상의 일부다. 특히 아침에 마시는 차 한 잔은 하루의 에너지를 정돈하고 좋은 기운을 불러온다. 숙소에는 철관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아한 향을 지닌 철관음은 피로를 풀어주고, 기력을 회복시키는 차로 잘 알려져 있다. 차 한 스푼을 다관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붓고 3분. 고요한 기다림 끝에 향기로운 한 잔이 완성된다.

운이 좋게도 머무는 내내 쾌청한 날씨가 이어졌다. 딸기, 요거트, 커피로 간단히 아침상을 차려 마당에 앉으니, 봄 햇살이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따뜻한 기운이 몸에 스미며, 하루를 천천히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이 집필한 에세이 <보통 이하의 것들>의 해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현대인들은 모두 일종의 ‘일상적 실명’ 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삶을 이루는 진짜 요소들을 지각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페렉에 의하면, 일상적 실명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현재가 되는 것이라 말했다.”라고.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삶의 본질에 한층 가까워지려는 작가의 태도에 일견 동의하지만 내겐 글쓰기보다 여행이 현재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렇기에 주기적으로 비일상적 시공간에 머물며 현재를 감각하고자 애쓴다. 이번 '한옥에세이 서촌'에서의 여정 역시 지금 눈앞의 것들을 오감으로 천천히 느끼고, 사유하며, 현재에 기거하는 귀중한 시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