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그램 스테이 강진전라 / 강진군
2025. 5. 22. by. 신은지
글ㆍ사진 ㅣ 신은지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소음을 듣고 싶지 않다. 그리고 대뜸 숨이 턱끝에 차는 느낌이 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그러나 자극이 없고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 그래서 강진으로 떠났다.
주변에 물어보니 그 누구도 강진을 가본 이가 없다. 남쪽 끝자락의 인구소멸도시, 그러나 동시에 남도답사 1번지의 여행지란다. 어떤 분위기일지 짐작하기 힘들었으나 5시간 걸쳐 도착한 강진은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을 보여줬다. 이토록 평화로운 풍경이 또 있을까.
이번 여행의 거처는 코오롱에서 전개하는 브랜드 에피그램에서 운영 중인, 에피그램 스테이 강진. 작년 스테이폴리오 유저가 가장 많이 예약한 곳이라 궁금했고, 가장 강진다운 곳에 머물고 싶었던 점도 선택에 한몫했다.
에피그램 스테이 강진은 정약용이 머물던 사의재 옆 한옥체험관을 리모델링한 숙소다. 인구소멸도시 활성화에 기여하고 지역과 상생하는 로컬 경험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뚜렷하다. 진정성 있는 공간. 시내 인근에 있어 주변을 여행하기에도 최적의 위치다.
낮은 돌담을 따라 걷다, 리셉션 역할을 하는 안내동으로 들어선다. 단순한 체크인 라운지라기엔 강진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공간이라고 할 법하다. 웰컴티와 함께 스테이에 대한 안내를 받고, 제공되는 관광 지도와 함께 주변 지역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의외로 좋았던 것은 에피그램의 옷을 대여할 수 있다는 점. 질 좋은 외투를 빌린 덕에 쌀쌀한 저녁 바람이 거뜬했다.
에피그램 스테이는 다양한 구조의 객실을 갖추어, 방문 인원과 목적에 따라 선택의 폭이 넓다. 마량, 청자, 모란 등 강진의 이야기를 함축한 객실명도 인상적이다. 그중 머무른 객실은 2-3인이 넉넉히 머무를 수 있는 '다산'.
대문을 들어선 순간 외부로부터 차단되는 감각이 흥미롭다. 마당은 높이 솟은 오죽과 낮은 정원목으로 둘러싸여 프라이빗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한옥 구조의 객실은 이 초록 풍경을 온전히 마주하고 있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마당 한쪽에는 목재 아웃도어 가구, 한옥 기둥과 주춧돌을 모티브로 만든 벤치 등이 놓여 원하는 방식으로 자연에 머무를 수 있다.
이 객실은 임태희 소장님이 디자인한 곳이기도 해서 기대가 컸다. 한지문화산업센터, LCDC 서울, 을지다락, 그리고 온양민속박물관 카페까지 소장님이 설계한 공간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모든 공간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취향에 맞았던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행보를 응원했던 분이라 이 공간을 하루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는 점도 내게는 참 매력적이었다.
사방에 창이 나 있어 녹음이 비치는데, 특히 외부 창호는 창호지가 아닌 유리로 마감되어 빛이 푸르게 산란하는 모습이 놀랍도록 아름답다.
또 흥미로웠던 지점. 한옥 스테이는 다도나 온욕 외에 결에 맞는 즐길거리를 갖추기 어렵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에피그램 스테이 강진은 잘 맞는 경험 요소가 굉장히 풍부하게 마련되었다.
지역 상품으로 큐레이션 한 차와 표고버섯 스낵, 편지를 쓸 수 있는 도구, 무엇보다 전통 놀이함과 서예함이 준비되어 하루를 촘촘히 채울 수 있었다.
빛이 잘 든다. 적당한 온도의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마루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곳곳에 놓인 공예 작품은 공간의 감도를 올린다.
한옥 구조이나 편의성도 살렸다. 벽처럼 보이는 하얀 양개문을 열면 간이 주방이 나타난다. 취사는 어려우나 냉장고와 싱크대, 정수기가 배치되어 있었고, 수납장을 여니 비상약이 있어 세심한 배려를 느꼈다.
다산 객실은 마루와 이어지는 좌식 영역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구조다. 우측에는 침실이 있는데 머리맡의 작은 창과 작은 서재 영역으로 검박하게 꾸며졌다. 편안한 조도가 인상적이었다.
책장에 비치된 책은 강진과 로컬 여행에 관련된 것으로 큐레이션 되어 공간에 이야기를 더한다.
침실 옆으로는 소파베드가 자리하며 이 공간을 통해 다시 마루로 연결된다. 공간이 자연을 향해 열려 있는 덕에 어디에 있든 맑은 공기와 빛이 스며들었다. 준비된 아로마 디퓨저와 스피커를 사용해 멍하니 생각을 비우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낸 욕실. 욕실이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실제 방문하니 천장이 높아 오히려 쾌적한 공간감이 좋았다. 녹음이 아름답게 비쳐 욕조에 몸을 담그고 창밖을 바라보며 여독을 풀었다. 준비된 어메니티는 데미플로의 제품이었는데, 시트러스 노매드 향이 리프레시하기에 알맞다고 느꼈다.
스테이에서 쉬다가,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강진만생태공원으로 향했다. 차량으로 8분 거리에 있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머리 위로 흔들리는 갈대 사이를 거닐며 다시 한번 체감했다. 강진이 가진 자연유산은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다.
평야도 있고, 산도 있고, 바다도 있으나 모든 것이 고요하고 차분하게 흐른다. 바다는 땅 깊이 들어온 만의 형태로 거세지 않고 평온하며, 넓은 들과 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음에 쉼을 가져다준다.
종종 가을이면 순천만을 가곤 했는데 개인적으로 그 갈대밭보다 소박한 이곳이 더 좋았다.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이 넓은 땅 위에 우리만 우두커니 선 감각이 만족스러웠다.
갈대 사이로 넓게 흐르는 강 혹은 바다, 이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물길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안정을 준다. 정말로 조용한 휴식을 원한다면 강진으로. 쉼이란 무엇인지 알려줄 것이다.
강진은 8시만 되어도 문 여는 식당을 찾기 어려우니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좋다. 인근 시장에서 저녁을 챙겨 먹고 에피그램 스테이로 돌아왔다. 시내와 가까운 위치라 별이 보일까 했는데 하늘을 촘촘히 채운 별 무리에 멍하니 정원을 거닐었다.
해가 저물었으나 잠들기에는 먼 시간. 그러나 일러야 자정에 잠드는 서울 토박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의외의 놀거리가 가득하므로.
놀이함을 열었더니 공기놀이, 팽이놀이, 윷놀이까지 준비되어 있다. 만듦새가 좋은 기물이라 놀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다. 오랜만에 핸드폰이 아니라 색동 천이나 나무 조각 같은 것들을 만지며 게임을 하는 순간은 그 자체로 마음을 정화하는 듯했다.
잠들기 전에는 침대에 누워 곁에 놓인 책을 읽었다. 강진의 명소를 천천히 살펴보며 내일 여행 계획을 가볍게 세우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은은히 비치는 햇빛과 새소리로 눈 뜨는 아침. 준비된 발효차로 속을 따듯하게 달구며 하루를 시작했다.
9시 30분에 맞추어 직원분이 조식을 가져다주신다. 예쁜 바스켓에 담긴 모습. 에피그램 스테이 강진에서 제공하는 조식 서비스 '강진의 아침'은 꼭 신청해 보길 추천한다.
강진 시내에서 꼭 방문해야 할 오감통의 26빵집 무화과 식사빵, 크림치즈와 블루베리잼, 강진에서 난 계절 과일, 따듯한 양송이 스프로 구성된다. 간편하지만 메뉴 하나하나 맛이 좋고,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다.
체크아웃 시간 11시에 맞추어 나갈 채비를 끝내고, 마루에 걸터앉아 여유를 만끽했다. 에피그램 스테이에서 즐긴 마지막 경험은 서예. 천천히 먹을 갈고 농도를 맞추어 붓으로 글을 썼다. 화선지에 번지는 먹의 질감이 신선하다. 원초적인 글쓰기의 즐거움을 느꼈다.
체크아웃한 이후에도 에피그램 스테이에서의 여정은 이어졌다. 체크인 라운지를 통해 얻은 여행 정보로 하루의 일정을 정한 것이다. 담백한 멋이 인상적이었던 다산 객실에 머무른 만큼,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어 방문한 사의재와 다산초당.
그리고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쓴 시인 김영랑의 터 또한 강진에서 거닐어볼 수 있다. 사의재와 영랑생가 모두 에피그램 스테이 인근에 자리해 함께 둘러보기 편리했다.
무엇보다 월출산에서의 머무름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주었다. 월출산은 백운동 정원, 무위사 등 꼭 가볼 만한 명소가 많으나 넓은 차밭으로도 유명하다. 정약용 선생이 차와 인연을 맺은 곳도 강진.
한번 둘러보기만 하려 했는데, 백운차실에서 일요일마다 차밭을 걷는 로컬 모임이 진행된다는 정보를 체크인 센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즉흥적으로 참여하기로 했고, 상상 이상의 충만함을 얻었다.
차를 사랑하는 분들이 다정하게 맞이해 주셨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하고, 차를 나누어 마시고, 실제로 찻잎을 수확하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강진을 온몸으로 느꼈던 순간이다.
마지막 행선지는 강진만 가운데 우두커니 솟은 신비와 평화의 섬, 가우도.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더 근사할 것 같아서 늦은 오후에 들렸고,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직 걸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긴 다산다리를 건너, 황가오리빵을 입에 물고 출렁다리를 가로지르며 섬을 탐험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졌음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잠시 모든 것에서 멀어지기를 택했으나 그 어떤 외로움도 고독함도 없었던 곳.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강진을 경험하며 생각과 마음이 트이는 시간을 가졌다. 다정한 침묵의 도시로 강진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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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er 신은지
공간을 통해 세상을 읽는 뚜벅이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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