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더리제주 / 제주시
2025. 6. 4. by. 고서우
글ㆍ사진 ㅣ 고서우
“도심에 이런 스테이가 있었어?” 이곳을 마주하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이었다. 이날, 친구에게 오후 일정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은 스테이에서 하루 자고 올 거야.”라고 했더니, 그 위치를 물어왔다.
제주도민이 알기 쉽게, 삼양 근처 도련동에 있다고 하니, 그 동네에도 감성 숙소가 있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막상 마주하고 나니 새삼 나도 친구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감성적인 파사드가 나를 마중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날씨는 맑다가도 이내 흐려지는 모습이었다. 막 도착했을 때는 그림자 하나 없을 정도로 햇살 한 점 내려오지 않길래, 제주도 날씨가 그렇지 뭐, 하고 말았는데. 또 얼마나 흐르니 곳곳에 예쁜 그림자가 찍히고, 그러다가도 다시 쏙 하고 숨어버린다.. 참으로 장난스러웠다.
‘라운더리’는 독립된 세 개의 동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축물이다. 한 동은 호스트 가족이 머무는 곳이었고, A객실과 B객실이 각각 손님맞이를 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높은 벽체는 손님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역할이기도 했지만, 도심으로부터의 격리를 느끼게도 했다. 체크인을 위해 A객실 대문을 향해 한 발 딛는 순간에 느껴졌던 그 단절감이, 이 건물이 나를 단숨에 품어 도심 아닌 한적한 시외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 같았다.
문을 열자 아늑함이 몰려왔다. 들어가자마자 탁 트인 분위기를 더 자주 만나왔는데, 이곳은 한 번 더 공간을 꽁꽁 숨겼다.
고개를 빼꼼히 좌측으로 하자, 거실 겸 주방이 나타났고, 통창으로 보이는 정원까지 합세하여 공간감을 만들고 있었다. 사실,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것은 화분이었다. 초록은 같지만, 각자의 모양을 뽐내고 있는 화분들이 참 많았다.
딱 하나 놓여있는 것을 볼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호스트께서 정말 식물을 사랑해서, 여기 오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보였다.
나도 요즘 작은 식물들을 사서 화분에 옮겨 심고 매일 관찰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그중 가장 최근에 데려와서 키가 자란 모습이 궁금한 녀석이 있는데, 여기 바로 그 모습이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이어 내부를 둘러보았다. ‘라운더리’는 거실 겸 주방에 평상이 있고, 평상은 통창으로 이어진 정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있다.
이곳에서 식사해도 좋고 노트북이나 책을 읽어도 좋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해서, 이렇게 가까이에서 밖을 볼 수 있는 통창을 만날 때면, 비가 내려도 좋겠다고 꼭 생각한다. 사진으로 담기에는 이왕이면 맑은 날이 좋겠지만. 내 눈에 담기에는 비 오는 날이 운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무튼 그 거실은 다시 작은 정원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니까, 정원이 두 개다. 작은 정원에는 캠핑용 테이블과 의자가 세팅되어 있는데, 원하면 바비큐를 해 먹을 수도 있는 정원이다.
주방에는 손님을 위한 것들이 많았다. 바비큐와 연결되는 듯 보이는 매운맛 컵라면도 있었고, 근처 커피 맛집으로 유명한 카페의 원두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간 봐 왔던 스테이들과 조금 차별화된 부분이 있다면, 핸드드립에 진심이었다랄까.
그냥 원두와 그라인더, 드립 포트 정도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봐 왔지만, 서버의 온도와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커피 저울, 이것들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레시피, 사용 방법 등이 함께였다.
커피를 내 손으로 내려 마신다는 것이 조금 귀찮게 여겨질 때가 많아, 스테이에 머물며 핸드드립까지 내려 마신 적은 손에 꼽는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된 모습을 보니 일일 바리스타가 되어, 제대로 내려 마시고 싶다는 용기가 일었다. 종이에 적힌 글들을 읽어가며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셨다.
원두가 참 맛있어서, 한 잔 더 내려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를 들고 공간을 더 둘러보아야지.
침실 문을 열면, 역시 통창으로 가득 담아내는 정원이 보인다. 이 정원은 아까 주방 평상과 이어지는 정원인데, 침실에서는 문으로 연결되어 나가볼 수도 있다.
문을 열고 나가 꽃도 보고 나무도 보았다. 도심에 쉴 자리 없는 새들이 자주 다녀가는 듯 짹짹거리는 소리가 많이 났다. 노란색 꽃망울이 참 예뻐 보여 사진을 찍었다.
예전만 해도 꽃이라면 매화나무나 복숭아나무 정도 관심 주는 수준이었는데, 식물을 내려다볼 줄 알게 되니 세상이 이토록 귀엽다. 아주 넓지는 않아도, 볼 것이 많은 정원이었다.
정원에서 뒤를 돌아보니, 안에서는 아직 못 본 욕실이 보였다. 욕조가 놓여 있었고, 붉은색 타일이 눈에 띄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욕실 타일의 색깔이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은 바깥에서 보기보다 더 넓었고, 쾌적했다. 곳곳에 통창을 둔다는 것이 이토록 공간감에 이득을 주는구나, 하고 지식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 욕조로 가까이 가서 보니 입욕제가 놓여 있었다.
필히 오늘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겠다면서 입욕제를 들었다가 내려놨다.
정말 커피 한 잔을 더 내려 마셨다. 향이 좋았고, 눈앞에 보이는 정원을 바라보는 게 좋아서 평상에 머물고자 했다. 며칠 동안 일이 많았던 탓에 해가 지기도 전 눈부터 감겨왔지만, 좋은 것들을 곁에 두고 잠에 빠져드는 것은 너무 아까웠다. 몇 번이나 침실과 거실을 오가며 구경했다.
아! 공간을 구경하다, 잠시 내려놓고 잊은 게 있었다. ‘라운더리’에서 주는 ‘웰컴 기프트’. '라운더리'에서는 비정기적으로 와인 이벤트를 진행한다. 제공되는 와인은 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지만, 이번에는 더운 날씨에 잘 어울리는 와인이었다.
이 초록색의 와인을 고르시면서 많은 것들을 고려하셨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였던 나는 못내 와인을 까기가 아까워 주섬주섬 챙겼다. 스파클링와인을 보며 침만 꼴깍 삼키다, 밤에 맥주를 사러 갔다는 이야기를 이어 해야지.
잠깐 침대에 눕기도 했다. 베개에 비스듬히 뒤통수를 대고 있을 뿐이었는데, 누군가 내 눈꺼풀을 누르는가? 눈이 저절로 감겼다. 이대로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려 잠에서 깼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침, 배꼽에서 꼬르륵하는 소리.
‘라운더리’는 도심에 있어서, 어떤 음식이라도 배달해 먹기가 편했다. 차를 타고 나가는 것도 좋았겠지만 도저히 그럴 힘이 없었다. 뭘 먹을까 한참 고민하다 맥주와 밥반찬이 동시에 되는 돈까스를 주문했다. 도착하기 전에 얼른 나가서 맥주를 사 올 참이었다.
편의점이 도보로 3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이렇게 편리할 수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를 두 캔 집었다. 밥 먹으면서 영화도 보겠다는 욕심으로 과자도 하나 골라 나왔다. 코앞이 내가 머물 곳이니, 부담이 없다.
식기류를 식탁에 올려두고 영화 한 편을 골라 놓으니, 타이밍 좋게도 음식이 도착했다. 받으러 나갔다가 한 번 더 올려다본 저녁의 ‘라운더리’가 근사했다. 야간 조명등이 건물을 비추는데, 세워둔 차를 옮겨버리고 싶었다. 몇 걸음 물러서서 보다가 들어왔다.
식탁 위에 모든 것을 차려두고, 통창 밖에 보이는 불 켜진 정원도 잘 보이도록 앉았다. 오랜만에 조용히, 행복을 만끽했다. 이날따라 맥주가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한 캔 더 사 올 걸 하는 아쉬움도 오랜만이었다. 통증들이 약간 사라지는 그 정도의 취기였다. 최고의 식사.
그리고 영화 중간부터 뜨거운 물을 받기 시작했던 욕조를 확인했다. 들어가기 좋은 수위가 되어 있길래,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지는 오늘에 만족하며 간단히 샤워하고 입욕제를 풀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이제 밖으로 나가야지, 하는 찰나에 정원의 야외 등이 꺼지며 완벽히 어두운 밤이 되었다. 굳이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았다. 어차피 높은 벽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고, 아침 햇살을 그대로 맞고 싶은 정원이었기에 그대로 뒀다. 밤이 되어서도 블라인드나 커튼을 치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 아닌가 되짚어 봤다.
그대로 정말 잘 잤다. 예상했던 대로 아침 햇살이 얼굴을 괴롭히며 일어나라고 깨웠다. 이불을 돌돌 말아서 옆으로 돌아누워 얼마나 더 잤을까? 개운한 기분으로 알람 소리를 들었다.
짐을 챙겨 나오니,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다. 와인 한 병을 손에 쥐고 끝내는 초여름의 여행. ‘라운더리’에서의 시간은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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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er 고서우
당신과 나눠 가질 나의 공간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