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ㆍ사진 ㅣ 신은지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기록하던 시절이 있었다.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매일 마주하는 아침 공기, 반복되는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 익숙한 사람들과의 평범한 대화. 그러나 그 무엇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항상 새로움이 있었다. 나를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감각이 소중하고 아름다워 필사적으로 일기를 썼다.

전주에 자리한 스테이 '생활과 기록'을 만난 순간은, 무언가를 기록하는 법을 잊어가게 된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두 가지를 모두 이름에 품고 있다. 생활, 그리고 기록. 참 담백한데 따스하고, 또 단단한 어감이 마음에 든다.

생활은 반복된다. 기록은 영원하다. 어쩌면 '생활'과 '기록' 사이에는 아주 큰 간극이 있을 것이다. 덧없이 반복되는 작은 생활. 기록으로 남겨 되새길 때에야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다. 그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된다고 했다. 이름 없는 일상에 이름을 붙여 주는 기록의 즐거움을 막연히 되새겨 본다.

그렇기에 스테이 '생활과 기록'은 '생활'과 '기록' 사이를 연결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무던하게 흘러가던 일상을 특별하게 느끼게 할 여유를 선물하고, 곳곳에 조용히 놓인 빈티지 가구는 지금껏 쌓아온 누군가의 기록을 드러내며 머무는 이에게 대화를 건다. 분명 나는 이곳에 없었으나, 왠지 모를 향수와 추억이 느껴지는 기묘한 즐거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완성한 공간은 그 자체로도 멋스럽지만 넓고 아름다운 정원과 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창과 개방적인 구조, 감각적인 빈티지 가구와 제품이 어우러져 '생활과 기록'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한옥을 둘러싼 정원이 무척 매력적인데, 정원 군데군데 파라솔과 벤치, 노천탕 등 자연을 가까이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 안으로 들어서면 한옥 목구조를 고스란히 살린 높고 넓은 거실과 다이닝 공간이 나타난다. 어디에 있든 따스한 볕을 느끼게 된다. 외부에 열려 있었던 마루를 유리창으로 막아 큼직한 파노라마 창처럼 활용한 덕분이다.

공간에 감도는 톤은 봄볕을 머금은 나무 색을 닮았다. 따듯하고 부드럽다. 이 포근한 분위기가 독보적인 빈티지 스타일을 뒷받침한다. 먼 바다를 건너 온 이국의 선반장, 장인이 직접 조립해 완성한 듯한 의자,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가는 동양풍 조명 등등.

빈티지 제품도 어느 하나 같은 모양새 없이 굉장히 절충적인데 군더더기 없이 잘 어우러진다. 이곳을 스타일링한 호스트의 감각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뉴트럴 톤의 타일로 마감한 조적 키친은 스페인 어딘가의 가정집을 연상시키다가도, 내추럴한 목재 가구가 놓인 다이닝은 도쿄 어딘가의 카페를 닮았다.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스타일과 다양한 국적의 가구가 한 공간에 모여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낸다. 

양 면이 모두 창으로 둘러싸인 다이닝 공간은 나른하고 기분 좋은 식사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손끝으로 와 닿는 도톰한 나뭇결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잡았다. 가벼운 린넨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여유가 묻어난다. 

스테이 '생활과 기록'은 외부 정원에도 아름다운 식물이 가득하지만 내부 역시 식물이 다채롭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태가 보이는, 튼튼하고 건강한 식물들. 마치 이 공간이 작은 온실처럼 느껴진다. 겨울에 와도 항상 봄일 것만 같다. 넓게 펼쳐진 몬스테라 잎은 두툼하고 광택이 있으며, 햇빛을 마주한 보스턴고사리는 풍성하기 이를 데 없고, 수형이 아름다운 야자는 그 기운이 무척 생기 있고 호방하다. 

침실 역시 한 면이 창으로 이루어져 정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거실과 다이닝 등 공용 공간이 무척 넓고 방은 작은 편이나 결코 답답하지 않다. 천장이 높고 창이 넓어 오히려 개방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방 한쪽에는 빔 프로젝터가 구비되어, 해가 저물면 아껴 두었던 영화 한 편 보고 잠들기에도 좋겠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감정도 함께 가라앉기 일쑤였는데 이날만큼은 예외였다. 사방이 어두워져도 외롭지 않았다. 같은 곳 하나 없는 아름다운 빈티지 조명에 그저 하나씩 빛을 들여 볼 생각으로 가슴이 설렜다. 원하는 만큼 공간에 빛을 채우고 나니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사람들이 왜 빈티지 제품을 수집하는지 전적으로 이해했다.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품은 옛 가구에서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손때 묻은 의자 귀퉁이나 칠이 벗겨진 수납장 모서리를 살피며 이 가구에 깃든 누군가의 추억을 더듬었다.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닌 느낌. 이곳의 가구와 조명은 물론이고 작은 오브제까지도 특별한 수집품이다. 갤러리에 온 것처럼 공간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를 추억하고 다시금 기록할 마음의 힘을 얻는다.

다이닝 테이블 옆 벽면에는 무인양품의 CD플레이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백예린의 곡이 흘러나오던 중이었는데, 선반장에서 CD 몇 장을 더 발견하고는 고민에 잠겼다. 커버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음반들이다. 결국 아직은 겨울이고, 또 이례적일 정도로 포근한 밤이니 러브레터를 꺼내 들었다. '생활과 기록'의 빈티지하고 아날로그한 감성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자 주방을 자세히 둘러봤다. 숙소의 결을 맞춘 빈티지 스타일의 집기가 가득해 보는 맛이 있다. 유럽의 한 동네 카페에서 사용할 법한 커피 잔, 광택이 나는 투박한 버튼을 갖춘 버터 색 전자렌지 같은 것들에 탐이 난다. 

물론 집기가 콘셉트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향신료는 모두 구비되어 있었고, 가지런히 줄지은 그릇 사이에 아이들 전용의 식기도 준비되어 있다. '생활과 기록'은 성인 3인까지 동반 가능하지만 유아 포함일 경우 4인까지 머무를 수 있다. 빈티지 가구가 있는 숙소는 노키즈 존인 경우가 많은데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속이 좋지 않아 숙소에 죽을 싸왔다. 정갈한 모양의 그릇에 옮겨담아 데우고 나니 제법 맛깔스러운 한 상이 탄생했다. 소박한 흰 죽도 든든한 한 상으로 만들어주는 생활과 기록의 플레이팅.

유려하고 동양적인 라인의 찻잔은, 뚜껑을 들추어 보니 그 속에 향긋한 홍차를 품고 있다. 고소하고 농밀한 밀크티 그 자체의 향인지라 설렘을 이기지 못하고 따듯한 물을 우렸다. 더없이 편안한 저녁 시간이었다.

욕실 역시 평범한 듯 비범하다. 높고 비스듬한 천장이나 독특한 타일의 조화가 예스러운 양옥 욕실을 연상시킨다. 타일이 눈을 즐겁게 했다. 표면이 일렁거리는 잿빛 타일과 흰색 타일, 둥근 타일이 조밀하다.

어메니티는 르 라보와 이솝의 제품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르 라보의 핸드솝은 바질과 산자나무의 향이었는데 피부에 남는 잔향이 청량하다. 이솝의 샴푸와 바디 워시도 차분한 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욕실에 걸터 앉아 발을 담그고 족욕 시간을 만끽했다. 욕실에도 큰 창이 있어, 창을 활짝 펼쳐 놓으니 신선한 밤 공기가 축축한 욕실을 환기해 주었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정원의 식물이 마치 그림 같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속에 들어간다면 이런 감각일까. 떠밀려오는 생각들을 어딘가로 다시 흘려보내며 물장구를 쳤다.

따스한 노란 빛으로 채운 침실. 머리맡에는 도자기 작품을 닮은 스탠드 조명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고가의 빈티지 조명임을 알게 됐다. 자태가 남다르더라니. 따듯하고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은 공간이다. 오랜만에 걱정 없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밝아온 여행지에서의 아침. '생활과 기록'의 체크아웃 시간은 오전 11시로, 볕이 아름답게 들어오는 오전 시간을 온전히 누리고 떠나면 좋다. 숙소에는 다양한 색과 모양을 지닌 잔이 종류 별로 진열되어 있다. 마루에 앉을지 소파에 앉을지 볕 좋은 자리를 곁눈질하다가, 결국 주방 창가로 다가가 작은 찻잔을 꺼내 들었다. 

숙소에는 중앙동 객사 인근의 로컬 카페 '디드'의 드립백이 마련되어 있었다. 향긋하고 고소한 내음이 다이닝 공간을 채운다. 짙은 커피 향, 그리고 커피 특유의 어두운 브라운 톤까지 고즈넉한 이 공간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무르기만 할 뿐인데 보고 느낄 것이 이토록 많다.  

'생활과 기록'에는 다양한 시간이 머문다. 이곳에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있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어느 땅에서, 어느 계절에 소중히 사용했을 옛 가구로 지나간 세월을 짐작하기. 그 시간을 거닐며 이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기. 나의 내일을 깨우는 찬란한 아침의 정원을 마주하기.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내일에 대한 기대나 희망 없이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이미 수많은 장소와 사람의 기록을 안고 있는 이곳이, 나를 응원해준다고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나는 나의 사소한 생활을 참 좋아했지만 그 무던한 일상에 지치기도 많이 지쳤던 모양이다. 공간에 가득했던, 이름 모를 추억들로 마음을 달래고 나니 무엇이 필요했는지를 알았다. 내게로 향하던 그 익명의 기록과 추억이 얼마나 편안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지를 상기했다. 삶에서 받은 상처는 기록으로 치유하자. 좋음과 싫음, 기쁨과 슬픔을 천천히 골라내며 나의 오늘을 추억으로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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